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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서려있는 사연을 들으니 마을은 어느 새 다른 빛깔의 옷을 입는다.

 

 

최인섭(구정리 예림에코빌 거주)

 

  일제 강점기 때 금평리 김애 마을에 살던 이은뢰는 화약을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주로 국내 포수들을 상대로 화약을 팔았지만 멀리 중국이나 소련까지 진출했단다. 평촌 요구르트 설립자이신 신관호 선생님은 마치 어제 일인 듯 또렷하게 기억을 더듬으며 옛 이야기를 신명나게 말씀하신다. 혹시 화약을 판 돈으로 독립군 자금을 얼마쯤 보내지 않았을까.’상상해본다.

  김형준 가옥 앞에서 잠시 멈춘다. 이곳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김형준은 3·1운동이 일어나자 태극기를 들고 제일 먼저 홍안송면 면사무소 앞으로 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마을과 관련된 인물과 집터를 깊이 있게 파악하시는 이번영 선생님의 설명이다.

  뜸티 할아버지, 이부윤 묘, 평촌요구르트, 지장골 복숭아, 거문배, 김형준 집과 그의 묘, 이기성 집, 풀무생협, 유기방아, 홍주 막걸리, 김애 정주나무... 금평리 상하중 마을과 김애 마을에 존재했던 인물들과 흔적들은 지금도 존재하는 홍동의 자산들이다. 이 선생님과 신 선생님의 주도 아래 가는 곳마다 서려있는 사연들을 들으며 마을을 돈다. 마을이 새롭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저 흔한 시골 풍경이지만 그 풍경 속에 깃들인 오래 전 이야기나 자산들이 존재하는 한, 마을은 특별한 빛깔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상하중 마을에서 김애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을걷이를 마친 논을 보며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논이 기른 쌀은 우리의 밥상으로, 공룡알은 소 먹이로, 볏짚은 마늘이나 생강 덮개로, 밑둥은 다시 논으로 간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벼를 만드느라 수고한 논아, 이제는 좀 쉬렴.’

  꽃상여를 아주 잘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상여 앞에서요령잡이역할까지 했다는 이종석 집 정원도 둘러보았다. 정원 곳곳에 세워 둔 조각 새들은 마치 금방 날아가 버릴 듯 생동감이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분이라 상여나 요령에 관한 역사와 문화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

  두 분의 말씀을 듣고, 자취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이렇게 자그마한 역사적 사실들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엮여 하나의 서사가 되고, 그 서사는 결국 홍동을 지탱하는 뼈대가 된다. 아울러, 홍동 사람들이 이루어내는 저마다의 유의미한 활동들이 이 뼈대에 살을 붙여 홍동이란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몸체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그리하여 홍동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면서 홍동만이 가진 독특한 무늬를 갖게 된다.’

  이선용 김애 마을 총무님께서, 우리들을 집으로 초대해 다과를 제공해 주셨다. 마을 부녀회원 몇 분과 함께 준미해 주신 핸드드립, 찐 밤, , 과자, 땅콩초콜릿, 유과. 우리들은 식탁에 모여 앉거나 서서 풍성한 가을의 맛을 맘껏 즐겼다. 잘 가꾼 정원엔 가을 정취가 한껏 배어 있어 한 폭의 풍경화였다. 한결 여유와 쉼이 있는 자리였다.

  3시간 쯤 걸으면서참여하길 참 잘했다고, 이 시간이 아니었다면 금평리만이 가진 이런 살아있는 역사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금평리가 가진 속살을 이처럼 잘 알 수 있었을까싶었다.『홍동 마을길 걷기야말로 홍동에서 터를 잡고 설거나 살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자리다. 주관해 주신 분들께 지면을 빌려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홍동에 귀촌한 새내기로서 마을의 내력을 알고 싶어 참여했고, 11월에도 함께할 생각이다. 홍동을 보다 깊이 알고 싶다면마을길 걷기에 참여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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